광복 이후 일본인들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일제 강점기 평양 시내
광복절(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되찾은 날이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로 귀환하는 해외 유민들로 우리나라는 혼란스러웠다. 남은 사람들과 돌아온 사람들로 나라는 북적거렸다. 대게 사람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나 해외동포의 귀환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년 전인 44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식민지였다. 8월 15일이 되었다고 일본과 한국을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1945년 8월 시점에 38선 이남에는 약 50만 명, 북부에는 약 27만 명의 일본인이 있었고, 여기서 만주에서 온 피난민 약 12만 명이 더 있었다. 그렇다면 약 100만 명의 일본인들은 어떤 식으로 생활하고 일본으로 돌아갔을까? 남아 있는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지냈을까? 바로 알아보자.
▲조선총독부의원
우리는 교과서에서 광복 이후의 정치 상황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해방 후 일본인에 대한 서술은 아예 없거나 한두 줄로 간단하게 서술되고 있다. 그만큼이나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에 일본과는 아예 떨어뜨려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해방 이후에는 아예 일본을 우리나라 역사에서 삭제하고 싶어 하는 경향을 가지고 국사책을 편찬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우리는 해방 후 일본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상식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은 해방 후에도 떵떵거리며 행패를 부리다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에 돌아갔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말만이 진실일까? 이번 글은 살짝 다른 부분을 짚어 보고자 한다.
▲소련군정하의 38선 이북의 주민회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의 광복에는 다양한 나라의 관계가 얽혀있는데, 익히 알다시피 미국과 소련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사뭇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미국은 오키나와 점령 이후 일본의 항복을 받고 1945년 9월 38선 이남으로 무혈입성하게 된다. 때문에 한반도 내의 일본인들은 항복한 이후였기에 미군에 호의적이었고 협조적이었다. 당연히 미국도 일본에 굳이 시비를 걸 필요가 없으니 38선 이남의 일본인들은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고 일본에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경우는 달랐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를 향해 진격했다. 일본의 반격은 지지부진했지만 어찌되었건 전투는 전투였다. 서로를 적으로 보고 한반도를 향해 진격하는 소련에게 일본은 호의적인 국가가 아니라 적대적인 적대국가일 뿐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항복 이후의 38선 이북의 일본인들은 38선 이남의 일본인들과 정반대의 생활을 하게 된다.
▲북한을 탈출하려는 일본인들
38선 이북의 일본인들의 생활에 대해서 따로 들어본 기억은 거의 없을 것이다. 38선 이북의 일본인들은 38선 이남과는 다르게 처참하고 처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만주서 오셨다니깐 혹 못보셨는지 모르지마는,낮에 보면 이 조그마한 장터에도 그 헐벗은 굶주린 것들이 뜨문히 바닥에 깔리곤 합니다. 그것들만 실어서 보내는 고 무산인가 아오진가 간다는 차가 저기 와 선채 저 차도 벌써 나 알기에 닷새도 더 되는가 봅니다만. 참다 참다 못해 자원해 나오는 것들이 한차 되기를 기다려 떠나는 것인데, 닷새동안이면 닷새동안 계속 굶은 것인들 그 속에 어째 없겠어요.”(허준, 잔등)
1947년에 발표된 <잔등>이라는 해방기 작품인데 일본인들을 헐벗고 굶주린 것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본인들의 생활은 처참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응징과 보복으로 집단으로 좁은 공간에 넣어져 단체 생활을 해야했으며, 조선인들의 감시하에 생활해야만 했다. 일본인들이 도망치기만 하면 잡아와 때리고 굶겼다. 과거 호의호식하던 친일파 경찰들을 주민들이 찾아와 살해하는 일도 부지기수로 발생했으며, 심지어는 남은 일본인들이 너무 배가 고파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찌꺼기도 주워먹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일본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일본인들은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아오지탄광에 가는 것도 지원했다고 하니 대단한 응징과 보복이었다. 그렇다고 이동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미군에 의해 점령된 38선 이남의 경우에는 1946년 2월을 전후로 일본인들이 본토로 돌아갔으나 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의 경우에는 억류 상태에 놓여 이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일본인들을 보호해준다는 38선 이남으로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전히 억류된 사람들은 배고프고 우울한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잔류 일본인의 생활에서는 한국을 지배하던 강한 일본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찾아볼 수 없으며 패전국민으로서 힘없고 약하게 살아가는 일본인의 모습만이 남았다.
▲일제시대 공중목욕탕
그렇다면 소련은 일본인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한에 있는 일본인들의 38선 이남으로 탈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군 장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소련군 관계자는 일본인 송환에 대한 지시를 받은 적이 없지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매우 귀중한 노동력’이다.”라는 그의 말을 통해 일본인들을 고이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남은 일본인들은 해방기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임시로라도 계속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일제강점기 교장으로 일하던 일본인들도 살기위해서,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공중목욕탕에서 물을 데우는 일을 하였다. 또한 잘사는 일본 부녀자들은 조선인 냉면 가게나 주막에서 일하였고,생활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여관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조선인집의 가정부로 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38선 이북의 일본인들의 생활은 조선인과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일본인들
어찌됬건 그랬어도 6.25 전쟁이후 혼란기를 틈타서 일본인들은 차츰차츰 일본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1961년 즈음에 일본인들의 귀환이 모두 완료되었다고 하니, 지금은 끝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이 생각하던 해방 이후 일본인들의 생활과는 달리, 헐벗고 굶주리던 일본인들도 있다는 팩트를 알리기 위해서 이렇게 글을 써보았다. 교훈은 없다. 오늘도 잡지식 하나 더 알아갔으니 좋지 않을까? 아 그리고 왜 이렇게 일본인만 불쌍하게 표현하냐고? 그냥 팩트니까.
대한민국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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