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의 품삯 - 마경덕
노루의 품삯 - 마경덕
글쎄, 뒷산 노루가 농사를 지었다 하네.
세마지기 울타리 없는 고구마 밭을 귀 밝은 노루가 드나들며 씨알을 키웠다하네.
깊은 밤, 마을이 깜박 졸 때 한 이랑 두이랑 고구마 순을 야금야금 따먹고 농사를 지었다네.
잠 없는 발 잰 노루가 참으로 극진히 그해 고구마 밭을 섬겼다하네.
앞무릎 꿇고 지은 입농사에 씨알이 굵어, 그해 농사는 포대포대 알토란처럼 재미를 봤다는데,
그러게, 이듬해 밭주인이 울타리를 쳤네.
고구마 순이 사라진 민둥 밭이 남세스러워 기둥 박고 그물치고 튼튼한 문을 달았네.
달빛도 새울음도 그 높은 울타리를 넘지 못해 넝쿨 순이 남실남실 고랑까지 기어갔네.
고구마 밭은 깊은 물길처럼 시퍼랬네.
보기만 해도흐믓한 넝쿨 걷어내고 드디어 두둑을 헐었는데,
그러게, 실뿌리만 줄줄 달려 나왔네.
이파리가 땅기운을 다 빨아먹고 밑은 허당이었네.
알고 보니 노루의 품삯은 이파리였네. 짐승에게 품삯을 아낀 농사는
암만, 헛농사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