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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괴물' 0~2장
미쩌리 | L:0/A:0
5/30
LV1 | Exp.16% | 경험치획득안내[필독]
추천 0-0 | 조회 829 | 작성일 2017-11-23 16: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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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괴물' 0~2장

 

 

 

 

  남작은 소문난 괴짜였다. 그의 기행은 이미 세간에 떠들썩할 정도였고, 특히 괴랄한 수집욕에 있어서는 단순한 가십인지 사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ㅡ이를테면 '인어의 피'가 담겼다는 수상한 병을 반 년 예산으로 구매하였다던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짐승의 가죽을 '용의 피부'라며 싯가의 배가 되는 가격을 주고 몽땅 쓸어갔다던가. 어떠한 괴작 시집의 단 한 페이지를 재산의 절반을 주고 겨우 구했다는 이야기까지오면 이러한 소문들이 진실인지 아닌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남작을 둘러싼 기행과 이야기들은 살과 다리를 붙여 여기저기 퍼져나갔다. 다만, 당시의 나는 그러한 소문과 조소, 조롱들을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어렸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남작, 그러니까 나의 조부는 나름대로 선량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조부에 대한 기억에 있어서 그 날의 일만큼은 괴이하고 충격적인 경험으로 내 기억속에 남았다.

  그 사건, 정확히 그 날은 길고 긴 장마가 끝나가는 어느날 중 하나였다. 서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던 나는 정원에 들어선 두 인영을 발견했다. 그들이 행상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노련한 노집사가 그들의 발걸음을 물릴 터였으나 그날따라 노집사는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조부, 남작은 그들을 환대하며 응접실로 모셨다. 부풀어오른 배낭에서 잡동사니들을 꺼내 늘어놓은 그들은 그것이 마치 둘도 없는 세상의 보물인 양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조부께선 그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기이한 수집욕을 지닌 조부를 속여 돈을 벌려던 사기꾼이었으리라 싶다. 한 주에도 몇 번이고 잡상인들과 행상들은 저택문을 두드렸고 미처 노집사가 걸러내지 못한 이들에게서 조부는 물건을 굉장한 값을 주며 사기도 했었다. 별 것 아닌 그릇과 접시들이 말과 포장만 잘한다면 어마어마한 값에 팔릴지도 모른다고, 많은 행상들이 생각했었던 것이다.

  "흠, 모두 가짜로군. 이건 일각수의 뿔이 아니고 그냥 윤이나게 칠을 한 나뭇가지이지 않은가? 저것은 또 그저 바다생물의 등딱지구만. 전설도 뭣도 아니야. 흔하디 흔한 것들이지."

  조부께선 수염을 쓰다듬으며 넌지시 물었다. 당황한듯한 상인들이 다급히 다른 물건들을 꺼내놓았지만 조부께선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순잡동사니들밖에 없군. 시간이 아까우니 이만 일어나겠소."

  "자,잠깐 나으리! 앉아보시지요! 사실 이것들은 명안이라고 소문난 나리의 안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소인내들이 시험해보려했던 것으로ㅡ, 자 이런 허접한 것들 말고 다른게!"

  깡마른 사내가 턱짓을 하자 덩치있는 사내는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꾸러미에 집어넣었다. 그 와중에 일각수의 뿔이 바스락하고 부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잠깐이나마 웃었던 것 같다.

  "다른게 있습니다. 사실은 나리께서 아주 맘에 들어하실만한 물건을 얼마전에, 아주 가까스로, 또 여신 엘가님의 보우하심 덕인지, 어찌되었건 구할 수 있었단 말입지요."

  "호오ㅡ, 더 말해보게."

  조부의 눈이 형형히 빛났다. 깡마른 장사꾼은 두 손을 비벼대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을만큼 진귀한 물건입니다만ㅡ, 저희들이 갖고 있어봤자 개, 돼지목에 진주아니겠습니까? 차라리 그 진가를 알아봐주는 사람에게 넘겨주자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나리를 뵙게 되었습니다요."

  "그래, 그래서 내게 팔고 싶다는 물건이 무엇인가? 나는 긴 말은 좋아하지 않네."

  "흐흐흐흐, 듣고서 놀라지마십시오! 물건은 바로 남작 나리께서 원하고 원해 마지 않아서 구하기 전까지는 죽더라도 죽을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는 그, 수의. 요정의 실로 뽑아낸 '수의'입니다."

  "수의라ㅡ!"

  조부의 짧은 읖조림을 끝으로 응접실엔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어렸던 나는 이번에는 그들이 또 어떠한 조악한 물건을 꺼내들지 흥미가 생겼다.

  "내가 '수의'를 가져왔다고, 그렇게 말하던 사람을 여럿 보았었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지금 모두 감옥에서 자신이 '수의'를 입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 자네들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네만. 자신이 있는겐가?"

  "남작 나리께 거짓을 말해 저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요? 물건이 맘에 안드시면 저희를 내치시던 마을 경비에게 말해 곤장을 치시던하시지요. 대신, 저희의 물건이 맘에 드신다면 그에 합당한 값을 치뤄주신다고 약속만 하시면 됩니다."

  "그리하지. 그럼 물건을 꺼내보시게."

  "좋습니다."

  깡마른 사내는 자신이 입고 있던 길고 후줄근한 겉 옷의 품 속에 손을 가져가는가 싶더니 '어떠한 물건'을 빼내며 자신있게 외쳤다.

  "자, 이것이 바로 '요정의 수의'입니다!"

  허억ㅡ, 하고 나는 마른 사내가 꺼내든 물건을 보며 숨을 집어삼켰다. 약간의 어지러움이 머리속을 휘저었다.

  "자, 어떻습니까? 이 황금같은 영롱함이!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죽은 자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 한다는ㅡ"

  떠들어대는 상인들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니 무엇이라고 할 만 한 것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상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손은 허공을 더듬으며 그곳에 지고의 지보가 있는 것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계속해서 현기증이 일었다. 조부는, 나의 할아버지께선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 오오오 이것은ㅡ!!"

  조부, 남작께선 본적 없을 만큼 두 눈을 크게 뜨고 상인에게서 '소중한 것'을 받아들었다.

 

  그 뒤의 것들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원인모를 어지러움과 고열로 앓아눕게 되었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큰 도시로 떠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광기의 편린이 나에게 있어서 조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기에 나는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병이 완치되었음에도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몇 년이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쩌면 독한 어지러움과 고열로 인한 기억의 오류이지 않을까, 사실 그 날의 일은 모두 꿈이었던게 아닐까. 그러한 의문을 품었다.

  조부의 상을 들은 것은 얼마전으로, 나는 질척한 기분을 견디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장마가 이어지며 모든 것이 축축하고 우중충한 가운데, 늙은 사제의 종부성사만이 빗소리 사이로 울려퍼졌다.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흙에서 흙으로ㅡ

  다들 침울한 표정이었다. 오직 관에 누운 나의 할아버지, 당신만이 그 '진귀한 수의'를 입으신 체 웃고 계셨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다 나은 줄 알았던 가벼운 현기증이 또 다시 머리 속을 뒤섞는다.


  아아, 길고 긴 장마다.

 

 

 

 

 

  - 1 -

 

 

 

   ㅡ손자, 이삭. 나의 사후 이제는 가문을 이끌어 가야할 남작에게 전한다. 내가 가진 모든 저택, 영지, 물품들을 포함한 재산 일체를 나의 친애하는 오랜 벗 리브가에게 물려주도록 한다. 다만 한 가지, 내 소유물 중 네가 원하는 오직 단 한 가지를 너는 유산으로 상속 받을 권리가 있다. ㅡ


   데라 마이어 남작. 인.

 

  청년은 종이를 몇 번이고 살폈다. 적혀 있는 것은 틀림 없는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마이어 남작의 글씨였고, 찍혀있는 인장 또한 착각할리 없는 남작가의 문양이었다. 깊은 한숨이 끓어오르는 것을 참아내며 청년, 아이작은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백발의 노집사를 향해 물었다.

  "에셀, 할아버지께서 제게 남기신 말씀은 이게 전부입니까?"

  "네, 유감이라면 유감이겠습니다만."

  노집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을 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집사인 엘리 에셀은 벌써 수 십년에 걸쳐 남작가에 충성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는 이해가가지 않는 유서 또한 자신의 조부인 데라 마이어에게 있어서는 지극히도 정상적이고 당연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ㅡ할아버지께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

  지난 십 여 년 동안 단 한번도 답을 내릴 수 없었던 질문이 다시금 머릿속에 기어올라왔다. 기인, 괴남작, 수집광 등 주변으로부터 조롱 아닌 조롱, 탄사를 듣던 할아버지이다. 분명 무언가 굉장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은 막상 별 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몰랐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단 한가지라니."

  아이작은 머리를 쥐어쌌다. 전선에서 전역 후 할아버지의 유산들로 평화롭고 단란한 나날을 이어가려던 자신의 계획에 금이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어흠, 제 입장에서 본다면ㅡ."

  노집사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이작의 기억속 그는 필요없는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작은 무언가 해답이라도 얻으려는듯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노인의 주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 주인님을 바로 옆에서 모셨던 제 입장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문제, 놀이 같은 것이 아닐까ㅡ하고 생각이 됩니다."

  "놀이라니요. 단순히 제게 유산을 물려주기 싫은 아니겠습니까? 한 가지라도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것은 핏줄에 대한 마지막 연민이겠구나 싶습니다. 뭐 그렇다한들 제가 무슨 염치로 토를 달겠습니까만."

  아이작은 자신이 할아버지의 요청을 무시한 체 몇 년이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잡동사니와 괴담으로 가득찬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군'에도 지원 할 정도였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집사는 빙긋 웃어보였다. 마지막으로 봤던게 십 여년 전이었는데, 이 사람은 나이를 먹은 느낌 없이 여전히 정정하구나ㅡ하는 감상에 빠져든 것도 아주 잠깐, 노집사는 유언장의 일부를 흰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적혀있듯이, 데라 님께선 가문을 이끌어 가야할 사람으로 도련님ㅡ, 아니 실례, 주인님을 지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진실로 데라님이 주인님을 원망하고 벌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면, 리브가에게 모든 것을 주고 그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잇게 하셨을 것입니다. 단 한가지를 물려준다. 힌트는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하고 노집사는 서재를 떠났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을까. 아이작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주욱 늘어뜨렸다. 눈 앞으로 보이는 것은 기억 속 할아버지가 개인 집무실로 이용하며 곧잘 계셨던 서재다. 아마도 유언장은 이곳에서 쓰여졌을 확률이 제일 높다. 이곳에서, 할아버지, 데라 남작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리브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짚이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왕도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데라는 종종 아이작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내용은 대체로 시답지 않은 얘기들, 이를테면 이번에는 또 어떠한 물건을 어떠한 값을 주고 구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와중 리브가라는 이름이 적혀있었음을 아이작은 떠올렸다. 분명 할아버지가 늘그막에 사귄 대화나 카드 게임의 상대, 그 정도의 친구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앞으로도 상관없을 것 같았던 것들이 지금 이렇게 자신의 앞을 막고 있다.

  리브가를 만나봐야 할 것인가.

  또 만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지?

  무언가 자신을 얽매이는 문제가 생겼다고 느끼면서도 그 문제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해결해야하면 좋을지 모르겠다ㅡ라고

  아이작은 고민에 빠졌다.

 

 

 


  - 2 -

 

 

  마이어 남작가, 그들의 저택은 가문의 이름을 딴 작은 도시 '셀 마이어'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지어졌다. 과거 왕도 메네즈 가문의 성을 건조했다고 전해지는 명공들이 남작가의 저택을 짓는대도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의 진위는 모르겠으나 몇 백년이 지나도록 별 다른 보수 없이 굳건히 서 있는 저택을 보면 그것이 꼭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길이 300 큐빗 폭 50 큐빗 높이 30 큐빗에 달하는 거대한 저택은, 대도시 왕도에서도 몇 없었을 뿐 아니라 왕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혔다. 넓다란 정원과 희귀한 꽃과 나무들 그곳에 놓은 공들인 조각들의 기괴함을 넘어 저택 내부로 들어가보자면 방문자들은 더욱 감탄을 흘리게 되는데, 대리석과 여타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희귀 암석들 그리고 백향목으로 지어진 기둥과 방들, 바닥을 가득 매운 붉은 융단에 눈이 부실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이 저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 보관실로 간다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아이작은 다른 곳은 몰라도 그 보관실로 들어가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아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이곳에 있는 신기한 잡동사니들을 보기 위해 할아버지 몰래 숨어들어가 혼나는 것도 서슴치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보관실에 들어서면 다소 어지러움과 울렁임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보관되어있는 물품 중 현기증을 일으키는 약품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다소 불폄함이 있더라도 참아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작은 보관실의 육중한 문을 양 손으로 힘껏 밀었다.

  아이작이 보관실로 향한 이유는 단순했다. 거부였던 조부 데라의 유산 중 단 한 가지만을 상속할 수 있었기에 그 '한 가지'가 무엇이 되느냐는 무엇보다도 중요 한 것이었다. 보관실에는 호사가들이 군침을 흘리며 값을 지불할만큼 비싼 물건들이 잠들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비싸고 값진 것을 찾아내야 한다.

  아이작은 결의를 다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틈 사이로 낡은 책들과 쇠, 가죽들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미묘하게나마 나는 이 향기는 정원에 잔뜩 심어져있는 튤립 계통 꽃의 향기일까. 기분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려오기 시작함을 느끼며 아이작은 무거운 발을 들어 보관실 안으로 들어왔다.
 
   수 세기에 걸쳐 모은 남작가의 재보가 알 수 없는 규칙성을 지니고 주욱 늘어져있는 모습은 실로 기괴하다못해 장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보관실은 어중간한 도시의 도서관만큼의 크기를 지니고 있었고, 수많은 장서들 또한 많은 책장에 꽂혀있었다. 이름을 알 수없는 짐승의 가죽과 박제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으며 낡은 갑옷들, 날 선 무기들이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 퍼렇게 빛났다.

  "비싼 것, 가장 비싼 것이 뭐지?"

  왠지 모르게 드는 주눅을 털어버리기 위해 아이작은 누구도 들을 일이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장마가 있었다고는 하나 아직 한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관실 안에서는 입김이 서렸다. 아이작은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곧 앞에 놓인 기이한 무늬의 병에 시선을 빼앗겼다.

  뭐라고 적혀 있는거지?

  병에 적혀있는 종이는 낡은 것이라 글씨가 얼룩지고 번져있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라도 문자 자체가 몇 백년 전 통일 왕국 시대에나 쓰였던 고어였기에 읽기에 불편했다.

  "아일로ㅡ 다차흐?"

  무슨 말일까.

  "아일로는 인어라는 뜻이야."

  아이작은 놀라서 병을 떨어뜨릴뻔 했다. 살아오며 들었던 그 무엇도 닮지 않았고, 앞으로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다차흐는 '피'라는 뜻이지. 쉽게 말해 인어의 피라는 말이다."

  라고, 상냥하면서도 엄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이작은 '인어의 피'라는 말에 깨름찍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병을 원래 있던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나서야 비로소 잠겨있었던 보관실 안에, 있을리 없을 방문자를 마주했다. 아니 이 경우엔 주거자가 되리라.
 
  보관실의 한 켠에 은빛으로 빛나는 얇은 커튼이 보였다.

  그것은 기억 속에서 없는 것이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무척 편안해보이는 이불과 침대.

  그것 역시 기억 속에서 없는 것이었다.

  침대에 걸쳐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그것은 어째선지 기억에 있는 것 같았다.

  아이작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음을 느꼈다.

  "리브가…." 

 

 

   작고 까맣고 하얗다. 그것이 소녀에 대한 아이작의 첫 인상이었다. 검고 풍성한 머릿결과 새하얀 피부, 순백의 네글리제 사이로 뻗어나온 가느다란 팔 다리.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게 어두운 눈동자가 반짝였다.

  "인어의 피는 폭발하는 것이야." 함부로 했다간 큰 코 다치지.

  소녀는 침대에서 가뿐히 일어났다. 무게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만큼 맨발로 차디찬 돌바닥을 사뿐 사뿐 걷더니 이윽고 아이작의 앞에 마주섰다. 예견치 못한 상황에 한 걸음 물러선 아이작을 마주보며 소녀는 손바닥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듯 팔을 들어올렸다.

  "흐응, 내 머리가 가슴밖에 닿지 않다니. 키가 큰 것은 데라와는 또 다르지만ㅡ"

  직후 아이작은 크게 숨을 집어삼켰다. 소녀가 흡사 작은 동물처럼 자신의 품안으로 뛰어들은 것이다. 뒷걸음질을 칠 새도 없이 가느다란 두 팔이 아이작의 양 허리를 휘감았다. 생각이 몸을 따라가지 못한 탓에 아이작은 무심코 소녀의 어깨를 붙잡아 밀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압력에 소녀의 몸은 미동도하지 않았다.

  "아아, 이 냄새는 잘 알고있어. 아니, 아니, 이것은 지금까지 봐왔던 그 누구보다 더 훌륭한…, 그래 더욱 훌륭한…, 훌륭한 뭐지?"

  소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이작은 무방비하고도 촉촉한 눈가와 마주쳐 고개를 슬며시 피했다. 가녀란 어깨를 잡은 손바닥과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두 팔, 그리고 한 사람분의 무게를 온전히 지탱하고 있는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소녀 특유의 체온과 성장하고 있는 봉긋함, 은은한 튤립의 향기에 아이작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린 소녀라고는 하나, 그녀, 리브가는 마치 사람의 무언가를 넘어선 요염함이 있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기호에 알맞게 취향대로 만든 '살아있는 인형', 그곳에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등을 훑고 못덜미 뒤로 내달리는 오싹함마저 느꼈다.

  "그만, 그만좀 떨어져!"

  아이작은 이성을 되찾고 소녀를 밀어냈다. 강한 힘을 주지 않아도, 이번에는 소녀 스스로 쉽사리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 네가 바로 데라의 손자로군!"

  "…그러는 너는 뭐지?"

  아이작은 소녀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아까 네 입으로 말했지 않느냐."

  귀족의 여인들이 격식을 차리듯이, 소녀는 손가락으로 네글리제의 치맛단을 가볍게 붙잡아 올렸다.

  "나는 리브가, 이 보관실의 주인이자 상속인이야."

  남작 나으리.

  소녀의 입가가 초승달처럼 기이하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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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2카
진짜 글 괴물스럽다
2017-11-28 08:39:39
추천0
씨몽키
잘 쓰시네용!
2017-11-28 15:26:06
추천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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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봄 -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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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7 0-0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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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 유치환
크리스
2021-10-17 0-0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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