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비밀
암흑이 순백으로 보일 때가 있지. 그럴 땐 흰 바탕에 흰 글씨를 쓰는 하얀 사람이 밤의 모서리에 석고를 바를 때. 우주의 처음과 끝이 약봉지 속에서 떨어져 내린 알록달록한 알약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질 때.
아파도 절반만이 아프고 누워도 절반쯤 잠을 자는 그런 밤이 올 때가 있지. 그럴 땐 추위도 모르는 때. 북극의 지평선 저만치에 놓인 냉장고가 되는 때. 그땐 소리가 없지. 방 한 칸이 줄 없는 비파처럼 통째로 공명통이 되지. 그럴 땐 울음에 홀리지. 홀린 채로 헐리지.
암흑이 비단처럼 보일 때가 있지. 그럴 땐 흑장미와 흑장미 가시와 흑장미에 앉은 벌 한 마리와 흑장미 그림자조차 비단이 되는 때. 가장 시린 한 구석만이라도 잠시만이라도 그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싶어지는 때. 지금은 시린 발을 담그지. 바닷물처럼 그 속에 정강이를 담그고 조금씩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보는 때. 할 일의 반만 하는 때. 할 말은 혼자서만 하는 때.
해갈을 욕망하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물을 잊게 되지. 사막낙타가 사막낙타가시나무를 우물우물 씹듯 제 입안에 고인 핏물로 목을 축이듯. 이게 내가 식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암흑은 인공위성으로 어제 찍어둔 빙하. 오늘은 사라지고 없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