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 최동일
Ⅰ
하나만의
정(淨)한 뜻을 밟아
엷은 유리창에
비치는 햇발이
사뭇
일렁이면
늘
간지럽게 어리우는
너의 얼굴
너의 동공이
한결
빛나며
무거운 그늘을
천천히
벗어난 다음 ―
아침에
거기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내가 물을 때
꽃이여
응답하라
'잔뜩
흰 눈 덮인 산야처럼
한결같은 세상
매양 피는 꽃들은
사철로 붉어 있고
더러
달과 냇물이
함께 흘러가더라.'
음탕한
옛 손바닥에
묻어나는 고뇌를
두루
삼키며
응결된 두 눈멍울을 들어
하늘을 보고
다시
깨어나는 바람에
조용조용히
과일이 익어 가면
꽃이
곱게 늙는다
늙어선, 꿈을 꾼다
그 주위는
너무 밝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나날들이 풀려
한 데 앉아서 피로를 털고
외따로 얽혀서
밤에, 휴식을 얻는다
휴식 속에
소곳이
회한(悔恨)이 피어난다
도란도란
이마를 마주 대고
― 이런 얘기
― 저런 얘기
메밀밭에 까토리가 숨어
잠자던 얘기로
꽃피우니
불시에
목이 메인다
Ⅱ
얼마만한
이유가
너의 가슴 벽에
몰래 남아서
숨쉬며
나를 일깨워 주는지
알고 보니
참은
통쾌하다
또한
얼마만한 자유가
자꾸자꾸
풀잎을 흔들어
슬기로운 바람과
만나는지를
― 경이(驚異)를
눈여겨보며
그렇게
세월 따라
흉내를 내며
나도
살고 싶다
자랑처럼 쉬운
일과(日課)를
나날이 목에 걸고
어정어정 뜰에 나와
큰 봉오리
작은 봉오리
매만지며
물 속에 갈앉은
앙금이 되어
이제는 마음 아픈
그리움도 없이
몇 날을
말
한 마디 아니하며
그냥 살고 싶다
Ⅲ
벌써 피인
몇 송이 꽃을 보노라면
조금은
의젓이
활기를 띠는데
지금은
꿈속에 남은 일만이
마냥
아쉬워라
풀려 난 강둑 위에
누워
혼자서 피리를 불면
그윽이 넘쳐 퍼지는
가느란 음률(音律)들의
작은
속삭임
― 그만 갈까
― 그만 갈까
귓전에는 매우
성급한 가락들이
더 가자고 더 가자고
보채는
소리
연해 들린다
그러면 우리는
아파 오는 다리를
까맣게 잊고
앉아 쉬던
새들마저 일어나
포롱
포로롱 높이
날아난다
꽃은 잠시도
쉬임없이 행진을
계속한다
아주
끝이 없는 영화(榮華)를
누리고자
머언 산
너머에까지 손짓을
보낸다
Ⅳ
밀려오는 것들의
숨찬 호흡 속에
마구
서성이는 나의
부산한 손은
터밭골에
석 자 남짓
언 땅을 파고
어서 오늘은
꽃씨를 듬뿍
뿌려야지
외가에서 가져 온
작약이며
뒷집 담벼락 아래서 받은
해바라기 씨
아암 그리고
아랫 마을 순이네
한테서 얻어 온 철쭉이랑, 목련, 디기탈리스, 금잔화, 채송화, 붉은 꽃, 흰 꽃, 가시 돋친 꽃, 향기 좋은 꽃 ―
이 많은 것들
가운데
어느 것을 선뜻
택하여 심어야 할지
아까워서 한참
망설이는 동안
문득
시절이
바뀐다
마치
신령이 듯
눈을 감고
노상 부는 피리 소리에
개였다
찌푸렸다
하는 날씨 ―
그러다가 오늘은
훈훈한 미풍이 일어
물기 오른 수목에
연연한 새 움이 돋아
꽃들은 피어나고
꽃 속엔
나래 고운 나비가
든다
이대로
퍽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
꽤
신나는 전설이
족히
천 년은 더
남을 꺼야
향수(鄕愁)는
꽃밭에 든 나비가 다스리고
전설은 여기 남아
오가는 이들의
얘깃거리가 되어
서로서로 다투며
미쁜 미소를 지어
너를 찬양할 테지……
― 그 때
전해다오 꽃이여
꼬옥 한 번만, 네가
겪은 일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