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관련 논쟁 참 신기한 것이
이승만 관련 논쟁 참 신기한 것이 이승만 논쟁하는 이들이 이승만의 독립운동가로서의 공적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는 듯.
이승만이 독립운동가 시절 해방 후 임시정부 최고위층에다가 마지막 주석까지 되고, 민족진영 3영수에 제일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로 유명해질 정도로 독립운동가로서 업적을 크게 세웠는데.
이승만의 비판점으로 불리는 위임통치청원, 그것도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순진하게 믿던 여러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흔히 있던 생각이었음.
김규식, 안창호가 대표로 심지어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은 안창호의 지시였음.
그래서 반이승만 파가 이승만을 공격할 때 이 논리 쓰니 안창호가 "위임통치청원건으로 공격할거면 나부터 축출해라."라고 괜히 이 말 한 것이 아님.
반이승만파에서도 그냥 트집거리 잡으려고 좀 언급한거지 나중 갈수록 그냥 생트집에 불과해서 별 언급도 안 된 것임.
물론 이승만의 독립운동 업적 중 공 95%, 과 5%에 속하는 일부 과오가 이 당시에 있기는 했음. 이 때 위임통치청원을 안창호의 지시로 했지만 마치 자신이 주도한 것인양 자신을 띄웠던 것. 고작 그게 전부임.
위임통치청원 내용도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완충국으로서 한국을 위임통치해달라."여서 한국을 보호국 삼다가 나중에 완전독립시켜서 일본 견제용으로 삼으면 미국에게도 이익 아니겠냐? 라는 뜻임.
당시 재미 한인사회에서 안창호의 지시로 파리 강화회의에 원래 내려고 이승만과 정한경이 파견가기로 한 거였는데, 미 국무부에서 비자를 안 내줘서 이승만의 파리행이 좌절되니 미국 정부에 제출했던 것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은 아예 비슷한 내용을 제출까지 함.
이렇듯 임시정부 초기의 내부분열과 갈등이 있다가 나중에 공산주의자가 되는 이들이 떨어져나간 후, 1930년대에 이르러서 저번 글에서 말했듯이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 대활약들을 보이며 독립운동가들 중 최고의 명망가의 위치까지 오름.
근데 이 이승만의 길고 긴 독립운동행적은 지금 이승만 논쟁 어디에서도 언급이 되질 않고 있고, 말하더라도 극소수에 머물다가 무시당하는 판국.
이승만이 어떻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마지막 주석에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인지 그 기반이 되는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서는 왜 다들 파고 들지 않을까?
팩트로만 역사를 보면 이승만이 왜 해방후에 그리 명망이 높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싶음.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탑 3에 들어가고,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취급받은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없나 싶음.
4.19 혁명 당시 하야 요구하던 시위대들까지도 대통령 이전에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로 정중하게 예를 보이며 "이승만 박사님, 만수무강하세요."라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가로서 크게 존경받았었는데.
독립운동가 탑쓰리에서 으뜸의 위치가 보통 활약으로 되는 줄 아나.
이승만은 친일파들 기용했어도, 내각 90%는 독립운동가들이었고 친일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독립운동가 1인자가 친일파로 왜곡된 것이 참...
애초 20세기까지만 해도 좌파들은 임시정부 부정하던 집단이었는데 21세기에 뉴라이트 놈들(주사파 출신들) 때문에 좌파들이 기회다 하고 갑자기 이미지 세탁질...
원래 좌파가 친일 성향이 강했는데 갑자기 변신했는데 이걸 지적하는 여론도 거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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