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라 쓰고 필연이라 읽는다 - 4화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에요, 하루오빠.”
“응?”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이래 뵈도 학교에선 존재감 없이 잘 살고 있는데. 물론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후배가 내 이름을 알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
는데...
“그럴 줄 알았어요. 휴....”
세라는 입술을 쭉 내밀며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세라와 나는 그 자리서 일어나 운동장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차분히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다.
“그래서...”
“.....”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세라라는 이름과 접점이 없다. 분명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세라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는 없었고, 동창생 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혹시 모르겠다. 졸업앨범에 세라라는 애가 있을지도.
“이름 기억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요. 제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정말 모르겠단 말이에
요? 제 순결이...”
“풉!”
아까 빵을 살 때 같이 산 음료수를 마시다 목에 걸려 내뿜었다.
“뭐, 뭐라고?”
“정말 기억 못 하는 것 같아서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생긴 것과 다르게 정말 무서운 농담을 하는 아이다.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뿐.
“일단! 너보단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어.”
이대로 가면 점심시간 내에 이야기를 끝맺지 못할 것 같아 먼저 말을 자르고 내가 할 말을 했다.
“옥상엔 왜 올라왔어?”
“.......”
세라는 뜨끔하더니 침묵을 유지한다.
“여기 옥상은 말야. 점심시간엔 금지구역이고, 웬만한 이유가 아니면 열어주지 않거든. 그런데 굳이 여길 올라오
다니, 그것도 신입생이.”
“......”
“이걸 말하면 정말 허탈할 것 같지만.... 나도 그렇고, 이걸 읽는 사람도 그렇고.”
“이걸 읽다뇨?”
“그런 게 있어.”
나는 말을 이어갔다.
“아쉽게도 범인은 너구나.”
“.......”
우선 정리하자면, 사건이 일어날 당시로 돌아간다. 나는 맨 뒤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가 힘들다.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들리는 목소리도 교장선생님의 비명소리와 그 후에 학생들의 웅성거림
이 다였다. 악의가 있어 일어난 사건이라면 누군가 정전이 되게 조작한 것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교
장선생님이 스스로 숨길 리도 없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 교장선생님의 가발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라곤 강당 위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들 중 한 명, 혹은 신입생대표로 올라갔던 세라. 일단 세라는 제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이 교장선생님의 가발을 가져갈 리는 없다. 그러니 제외.
그러나 내 고정관념 때문에 쉽게 풀릴 사건이 풀리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민하에게 말했었다. 모든 사건이 악
의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연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그리고 정말 우연적으로 이 사건이 일어난 것
이다. 범인은 신입생 대표인 세라다.
“일단 증거는...”
나는 옥상 출입문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 안돼!”
세라는 내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달려가 양팔을 벌려 내 앞을 막았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 보면 안되는 게 있는 것
처럼.
“가발.”
“네!?”
가발이다. 옥상 출입문 뒤쪽 계단에 있는 것. 그것은 교장선생님의 가발이다.
“일부러 한 게 아니에요.”
세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리려고 한 건 아니지만, 마치 내가 악역이 된 것 같다. 약점을 잡아 그걸로 뭔가
해보려는 저질 악당.
“나도 알아.”
“네?”
“나도 참... 아직 멀었구나. 이 시골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래봤자 뻔한건데. 너무 큰 기대를 품은 걸까.”
하고 혼잣말이 아닌 혼잣말을 내뱉는다.
불이 꺼졌을 때, 가장 놀란 것은 단상 위에 올라간 세라였을 것이다. 주위에 학생들이 있다면 모를까 단상 위에
올라갔을 땐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불이 갑자기 꺼졌을 때 여학생이 할 행동이라곤 주저앉는 것 뿐. 하지만 놀란
나머지 가까이에 있던 교장선생님의 가발을 붙잡은 것이다.
어떻게 숨기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는 나도 몰랐으나, 그 이후의 일은 세라가 직접 말해줬다. 이미 가발까지 들고
온 마당에 숨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전 날 같은 반 친구인 세환이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세라의 비명소리가 잠깐 들렸다고 했다. 그것도 교장선생님보
다 먼저. 그때 세라는 교장선생님의 가발을 붙잡고 손에 잡힌 이상한 감촉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그리곤
뒤쪽으로 던져버렸다.
불이 켜지자 교장선생님의 가발이 없어진 것을 보고 세라는 자기가 던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강당을 내려가는 계
단에 걸쳐져 있었지만 모두 교장선생님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내려오면서 옷 속으로 숨겼다.
“꼭 숨길 필요가 있었어? 그냥 나둬도 될텐데.”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집어왔더라구요. 이것 때문에 혼났어요. 집에 가니까 마땅히 둘 곳도 없고,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쩔까 싶어서.....그래서 다시 학교로 갔다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옥상엔 왜 올라온 건데?”
“가발이 날아서 옥상으로 올라올 수도 있잖아요.”
“응?”
“그러니까 가발이 슝~하고 날아서 옥상에 올라올 수도 있잖아요.”
“.......”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보는데......
참 어이없게도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났다. 세라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고, 내가 타이른 덕분인진 몰라도 다행히
세라도 죄책감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세라와 얘기한 결과, 나는 세라를 아는 것으로 판명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