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모르는 세계 최악의 열차 사고
우리만 모르는 세계 최악의 열차 사고
<기차사고의 대부분은 이렇게 끔찍하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서는 ‘군인정신’을 강조한다. ‘안되면 되게 하라’, ‘정신만 굳건히 무장하면 언제나 이길 수 있다’. 물론 ‘군인정신’은 보기에 좋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에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성이 빠져버린 ‘군인정신’은 어떤 모습일까? 1차세계대전은 근대와 현대의 한 중간에 있었던 전쟁이다. 때문에 전근대적인 정신이 여전히 팽배했던 과도기적 시대였다. 덕분에 그놈의 ‘군인정신’은 900명에 가까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900명이 죽었다니,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이냐고? 아니다. 그냥 엉뚱한 곳에서 벌어진 바보같은 사고 때문에 900명이 죽었던 사건이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렀던 1917년 12월,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측을 밀어내고 승기를 잡고 있었다. 심지어 미국이 전쟁 막바지에 참전하게 되어 영불연합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군의 방어를 담당하던 이탈리아 전선의 프랑스군은 겨울을 관통하여 한껏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 전선에서 간만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덕분에 프랑스 군부는 장기 복무한 병사나 전공을 세운 병사를 뽑아 15일간의 크리스마스 특별휴가를 부여했다.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전우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1000여명의 프랑스 병사들은 이탈리아 전선을 벗어나 알프스 산맥의 프랑스 국경 모단(Modane)역에 도착한다.
전쟁은 전선의 싸움이 아닌 보급의 싸움이라 했던가. 주요 수송수단인 열차는 보급에 쫓겨 늘 부족했다. 특히 객차를 끄는 기관차는 더더욱 부족한 형편이었다. 군부는 기관차를 아끼기 위해 두 편성의 열차에서 한 기관차를 빼내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한 편성의 남은 객차를 다른 한 편성의 열차에 연결했다. 즉 1개의 기관차가 9개의 객차를 담당하게 되있는데, 2편성(2기관차+18객차)에서 기관차 한 개를 뺐기 때문에 하나의 기관차가 18객차를 뒤에 달고 있는 모양새로 열차는 연결되었다. 이 중 두 개의 차량은 곡선 운행에 부적합한 고정식 바퀴 축을 가진 구형 차량이었다.
원래 2개의 기관차가 끌던 18개의 객차를 한 개의 기관차가 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누가 예상해도 알 듯이 견인력과 제동력이 급격히 완화된다. 제동력이 담보되지 않은 열차는 절대 운행되서는 안된다. 게다가 모단 역에서 연결된 열차 19량(=기차칸의 단위) 중 기관사에 의해 자동으로 제어되는 자동공기제동 장치는 앞에서 3량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어떻게 브레이크를 넣었을까? 중간에 배치된 제동수 7명이 기관사의 기적신호를 받아 수동으로 바퀴에 연결된 지렛대를 이용해 속도를 줄이게 되어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출발할 열차 앞은 알프스 산맥의 급한 긴 내리막길이었다. 기관사 지라드(Girard)는 당연히 운전을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을 아는 상식적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이것이 자살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운송 책임 장교는 기관사를 불러 문책한다. “군인정신으로 안되는 것이 어디있나? 안되면 되게 하라” 운송장교 대가리에 열차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도 한 몫하지만, 군인 정신이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구시대적 발상도 미스였다. 그런데 웃긴건, 마주 오는 기차를 지나가게 하기위해서 모단 역에서 열차가 1시간동안 대기하는 동안, 운송 장교를 포함한 모든 장교들은 열차에서 내렸다는 사실이다. 따로 준비된 특급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나. 예나 지금이나 장교가 실수하면 피해를 보는건 병사가 되는 알고리즘은 변하지 않는가보다.
12월 12일 밤 11시 15분, 천명이 넘는 병사를 태운 파리행 크리스마스 휴가 열차는 모단 역에서 출발해 곧바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기관사들에게 급경사 내리막길은 온 신경을 집중시키게 한다. 운전법도 평지와 다르다. 한국 철도에서도 "하구배 운전법"이라고 불리는 급경사 내리막길 운전 매뉴얼이 있다. 기계적 힘이 중력을 극복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운전하는 것이 급경사 내리막길 운전법이다. 출력을 최대한 낮추고 정지 상태에서 타력으로 내려가다가 속도가 시속 30~40킬로미터 정도 붙으면 제동을 써 정차시킨 후 다시 타력으로 움직이는 일을 반복한다. 잠깐의 실수로 가속이 붙어 제동력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면 아무리 브레이크 단수를 올려도 제동은 듣지 않게 된다. 기관사들은 이런 경우를 "비행기 탄다"라고 하는데 열차가 공중에 뜨게 되면 그걸로 모든 것이 끝장남을 의미한다.
크리스마스 휴가 열차는 나름 중대형 증기기관차였지만, 350미터의 길이에 526톤을 끌고 있었다. 누가봐도 하나의 기관차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양이다. 모단 역을 출발한 열차는 천천히 내리막길을 주행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바로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곧바로 “비행기를 타버렸다”. 기관차의 속도계에는 시속 135km를 가리켰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라 프라츠 역의 승강장에 서 있던 역장은 순식간에 역을 통과해 버리는 열차를 보고 심각한 사태를 직감했다. 역장은 산 아래 생 미셀 드 모리안느(Saint Jean de Maurienne) 역으로 연락해 막 출발하려던 열차를 정지시켰다. 모리안느 역에서는 영국군 2개 사단 병력이 모여 있었고 이들 중의 일부를 태운 열차가 막 출발할 예정이었다.
기관사는 최선을 다해 제동 핸들을 당겼고 객차 중간에 탄 제동수들도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 레버를 밀어젖혔다. 열차의 쇠바퀴는 브레이크와 밀착되어 벌겋게 달아올랐고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 불똥들이 목재로 만들어진 객차 밑바닥에 꽃을 피웠다. 불이 붙은 객차 안은 젊은 병사들의 비명이 가득 찬 생지옥이 되었다. 일부 병사들은 불길을 피해 열차 밖으로 뛰어내렸지만 생존 가능성은 없었다. 산 아래 모리안느 역을 1300여 미터 남겨놓고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지난 곡선 지점에서, 기관차에 연결된 첫 번째 차량이 탈선했다. 기관사와 제동수들이 브레이크를 최대한 작동시켰지만 제한 속도 시속 40킬로미터 지점을 시속 102킬로미터로 통과하던 중이었다. 7명의 제동수 중 2명은 이 과정에서 열차 밖으로 튕겨나갔다.
불길에 휩싸인 객차들은 앞서 탈선해 선로 옆 산길에 처박힌 차량 위로 차례차례 돌진, 산산조각이 났다. 열차를 휘감은 불길은 다음 날 저녁에서야 꺼졌다. 모리안느 역에 있던 영국군 사단 병력과 철도 직원들, 모단 역에 대기하던 프랑스군이 긴급 구조에 나섰지만 험난한 바위 지형에서 구조작업을 벌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파괴된 열차의 잔해 속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망 병사는 424명이었다. 135구의 사체는 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37구 이상의 사체가 철교와 난간 사이에서, 곡선 반경을 따라 이어진 수백 미터의 선로 우측에서 흩뿌려진 채로 발견됐다. 이들은 불길을 피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 병사들이었다. 183명만이 다음 날 아침 점호에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구조작업을 통해 살아남은 병사 중 100명이 넘는 인원이 호송 과정과 병원 치료 과정에서 숨졌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기관사는 군사재판에 넘겨졌다가 8개월 만에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900여 명의 젊은이가 숨진 이 엄청난 열차 참사는 몇 년간 비밀에 부쳐졌다. 군과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적을 이롭게 해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언론에 대한 통제도 철저히 이루어졌다. 사고 4일 후 일간지 <르 피가로>에 단신으로 실린 게 전부였다. 덕분에 900명이나 죽은 대형 사건을 우리는 잘 모른다. 세계 대전이라는 큰 사건 앞에 전근대적 ‘군인정신’의 폐해가 묻혀버리다니. 요새 우리나라 군대에서도 ‘안되면 되게 하라’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알고 진짜 ‘군인정신’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추천0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