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 박연준
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웬 물건들이 저리 많은지요
겨울 점퍼가 들어 있는 상자들, 못 쓰게 된 기타, 찬합통,
고장난 전축, 부러진 상다리 들이 저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가난한 집 방바닥을 내려다봅니다
가난한 집 장롱 아래는, 술 잔뜩 마시고 고꾸라진 늙은 남자가 누워 있습니다
어둠의 밀도와 병이 진행되는 속도에 따라 남자의 흰 수염이 자라나고 움직이지요
하얗게 일렁이며 꽃피우는 창백한 봄을,
가난한 집 형광등의 침침한 눈이 끔뻑 끔뻑 바라봅니다
가난한 집 물건들은 모두 사연 있는 듯 입이 무겁고,
가난한 집 아기는 종일 무릎으로 걷다, 심심하면 무릎을 안고 잠이 듭니다
가난한 집 행주는 소심하게 몸 빙빙 말고 있고,
가난한 집 선풍기는 우스꽝스럽게 달달 돕니다 돌다가 끽 끽, 헛소리도 합니다
가난한 집 장롱 위, 오래된 물건들은 보좌 위에 앉아 시름 많다고,
먼지들만 슬금슬금 날아듭니다
박연준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