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대전에서 백기는 왜 생매장을 감행했는가
전국시대 최고 명장이었던 진나라 불패의 장수 "백기"
역사적 사실을 아주 간략히 정리하여 재미로 써봅니다.
당시 조나라는 진의 폭군에 맞서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염파와 조사 중 조사가 급사하여 나라에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최고의 군략가 중 한 명이었던 인상여마저 지병으로 사경을 헤메는 동시에 조사라는 대장군을 잃어버린상황 입니다.
즉 조나라는 인상여/염파/조사 이 셋이 버팀목이었지만 인상여는 병으로 조사는 급사하여 염파만 남아버린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던 중 염파가 장평을 빼앗기지 않으려 참전하지만 3년여 간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버티기에 들어가기 바빳습니다.
조나라의 수뇌부와 왕은 안그래도 전쟁때문에 곡식이 작살났는데 이렇게 계속 농성을 유지 할 수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과 더불어 진 나라의 계략으로 조나라의 어리석은 왕이 염파를 귀환시키고 조사의 아들 조괄을 장평대전의 총 사령관으로 앞세웁니다.
여기서 조괄은 조나라의 대장군 조사의 아들인데 병법과 무력은 뛰어났으나 경험이 많이 부족한 장군이었습니다.
역시나 젊은 장군인만큼 대담한 기책과 전략으로 백기를 몰아내지만 이 또한 백기의 노련함에 모두 막혀버립니다.
결국 조괄은 매복되어있던 일개 졸병에게 화살을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총 사령관이 죽자 45만명의 조나라 인원이 투항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장평대전을 위해 백기가 하사받은 병사 수만 50만에 육박한다고 적혀있는데 이 45만을 흡수하자니 그만한 식량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풀어주자니 이들이 후에 반드시 진나라에 칼을 댈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백기는 깊은 고심에 빠집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정도의 수급을 올렸으면 분명 진의 도읍 함양에 승전보를 알렸다거나 이를 통한 진왕의 어떤 전언이 있어야 하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 백기가 독단으로 결정한 것 " 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백기는 분명 조나라 인원 45만에 대한 이야기와 대승을 거둔 전국을
분명히 진왕에게 보고했을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얘기합니다.
역사에 관련된 전문가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백기가 분명 진왕에게 보고를 했을 것이나 진왕은 이 모든 결정을 백기에게 미루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
이게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입니다.
타국의 병사 45만을 책임질 식량은 전국시대에 어느나라에도 없었습니다.
진왕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으나 중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이 모든 책임을 백기에게 미루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여기서 백기 또한 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졌으리라 생각하며, 후에 진왕은 그 불패의 백기장군을 귀향보낸 후 자살을 명합니다.
백기는 죽기전에 말합니다
" 조나라 사람 45만명을 학살 시킨 내 목숨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
" 진왕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 결국 무안군에 봉책되었던 최고의 명장 백기가 죽게됩니다.
사실 이 때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당시 진왕은 세상이 자신을 두려워하는게 아닌 백기를 두려워 하는 것이라는 소문에 어느정도 신경을 썻다고 합니다.
정말 백기를 죽이려하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쓰임새를 다했기 때문에 백기를 죽였다는 비정한 왕으로도 불리는게 당시 진왕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