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측) 부전의 맹세를 깨는 것은 에렌에게만 주어진 사명이다
각 계승자의 기억은 이어져있고 따라서 동일한 인물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베르크손에 따르면 인간의 자기동일성은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철학 추측글이 아니니까 생략하려 함.
작가도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고 그렸으리라 생각한다. 에렌이 처음으로 크루거와 그리샤의 기억을 전승하던 때에 '다이나, 너였구나'라는 말을 하고
가비는 갑옷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라이너에게 '하나가 되자'는 말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의미심장한 것은, 부전의 맹세가 왕이 바뀌어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로드 레이스의 동생 역시 부전의 맹세를 깨기 원했으나, 시조를 계승하는 순간 그 뜻을 포기한다. 시조부터, 로드 레이스부터 프리다 레이스까지, 모두 기억을 계승함으로써 '동일한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얼굴이라든가 이름은 다르지만 그들은 시조의 거인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샤와 에렌은 시조를 잡아먹었음에도 부전의 맹세에 빠지지 않는가?
지금까지 부정의 맹세를 깨고 싶어하는 수많은 왕들이 있었음에도, 시조를 계승하는 순간 그 생각은 바로 사라져 왔는데 왜 그리샤랑 에렌만?
그건 진격의 거인만의 특유한 정체성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진격이 시조를 먹었고, 양자의 정체성이 합쳐졌기 때문에 부전의 맹세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프리츠 왕은 벽 안의 삶을 낙원이라고 여기며, 싸우지 않는 것을 원한다. 반면 에렌은 벽 안의 삶은 가축의 삶처럼 치욕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유를 위해 싸우려고 한다. 정확하게 이항대립적이다. 거인 계승자의 사상이 드러난 경우는 시조와 진격 두 경우밖에 없었다. 이 둘 간의 대립이 이 만화에선 가장 근본적인 대립인 것 같다. 다른 거인들에 비해 진격은 고유 능력이 빈약한 편인데, 오히려 작중에 제시된 '자유에 대한 열망' 자체가 하나의 능력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르민 같은, 다른 거인의 계승자가 시조의 거인을 먹었을 때도, 두 거인의 정체성이 합쳐지면서 부전의 맹세가 깨질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조에게 정신이 먹혀버린다고 보는게 더 말이 된다. 왜냐면 당연히 시조가 초대형보다 격이 높기 때문이다. 시조는 말 그대로 거인들의 왕인데, 따라서 초대형이 아니라 시조의 정체성이 이어질 거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이런 추측이 만약 맞는다면, 2기 마지막화에서 라이너가 했던 말은 꽤 의미심장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그걸(시조) 가져서는 안 되는 건 에렌 바로 너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