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하 NTR
“……이드하 에투 바유!”
타라카족의 손이 우리를 짓뭉개기 전, 단말마마냥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체, 그건 아무 의미 없어. 그날 이후 윌라르브에서 몇 번이고, 진심을 담아 외쳤던 말인걸.
하지만 나의 체념을 비웃듯이 거센 바람과 함께 그는 나타났다. 수십 번의 브하바티 바유로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던 갑주가 짓뭉개지고, 빨간 눈을 짓쳐들며 마지막 발악을 하는 수라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표정 하나 변화 없이 눈을 뽑고, 바람의 칼날로 몸체를 난도질했다.
그럴 리 없어…….
◆
기억 속 그의 마지막 모습은 아테라의 여름철 아지랑이마냥 흐릿했다. 처음에는 이상한 신이라고 생각했다. 신관에게 소환되어 겨우 멸망한 행성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옮기는 일을 하다니, 오선신의 이름에 맞지 않는다고, 어린 시절의 나는 철없는 투정을 부렸다. 그의 물 빠진 듯한 회색머리도, 표정을 알 수 없는 오드아이도, 그리고 그 말도.
“이루어지지 못할 마음을 품고 있구나.”
평소처럼 수송선에서 스치듯 인사를 건네고 지나가던 도중, 그가 한 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제 발 저리듯 당황한 표정을 차마 감추지 못하고, 꾸벅 목례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입가에 네 글자가 자연스레 맴돌았다.
‘라오-리즈.’
그가 윌라르브에 아내와 딸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는 순혈이며 나는 쿼터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카르테, 그 멸망한 행성에서 오고갈 곳 없는 내게 한 줄기 빛과 같았던 그에게 내 마음에 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하지만 윌라르브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내 마음을 차차 정리해나가고 있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그를 어떻게 다시 보지……. 수많은 생각들은 거품이 되어 망울망울 올라와 내 머릿속을 한가득 채워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 이상한 신, 바유에 대한 작은 호기심이 피어났다.
바유는 특이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를 소환한 신관 – 트리실라 아제스와는 보내지 않았다. 수송선의 방향이나 속도, 연료의 양을 체크하거나 회의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면 그는 라오 리즈의 옆에 있었다. 보통 소환사와 신의 관계는 돈독하다고 들었는데, 제 3자가 봤을 때는 라오 리즈가 그의 소환사인 것만 같았다. 또한 가끔씩 몰래 그들을 지켜보는 나에게 알 수 없는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매서운 듯한, 무언가 귀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이상한 신이야.’
그에 대해 알아볼수록, 나는 그에 대한 평가가 점점 확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
사고는 윌라르브에 도착하기 2시간 전, 불현듯 찾아왔다.
“쾅!”
방이 뒤집어지는 듯한 진동과 함께, 강한 폭음이 들려왔다. 한창 잠에 취해있었기에, 처음에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창문 밖을 보니 윌라르브가 엄청 크게 보였다. 거의 도착한 건가? 아니, 윌라르브가 점점, 갑자기,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다.
수송선이 추락하고 있었다.
◆
우리의 신관님, 트리실라 아제스가 있는 동력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반쯤 파괴된 그곳에는 신관님과 바유, 팔 한쪽이 떨어진 라오와 온몸이 난도질당한 아샤가 있었다.
“라오, 괜찮아요? 상처가 깊어요!”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 그에게 달려가는 찰나, 바유가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그의 홀리는 듯한 오드아이를 보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민해봤으나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었다.
“동력이 파괴되었다. 이대로 가면 윌라르브에 도착할거야. 우리 모두 피떡이 된 채로.”
바유는 급박하게 라오와 신관님께 말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바유의 말에 트리실라가 굳은 표정을 짓고 반문하였다.
“너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추락하는 수송선을 막기에는 무리야.”
바유가 고통스러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
“라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말해봐, 바유”
“첫 번째는 나와 같이 신계로 가는 것이다. 너 하나정도는 데리고 갈 힘이 남아있어. 비록 나머지는 구하지 못하더라도, 내게 있어선 네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유의 말에 라오는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말했다.
“너도 내 성격 알잖아? 그렇게는 못 하는 거. 나머지 하나는 뭔데?”
그의 넉살 좋은 웃음에, 바유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
모든 힘을 다 소진한 그는 안나와 리즈를 마지막으로 안아보고 싶었다며, 처음 보는 눈물을 흘렸다. 기력을 넘어선 힘을 운용하게 되면 수명이 줄어든다고 한다. 바유의 마지막 제안은 일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힘이 필요했고, 그것조차 라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기력과 수명을 전부 소모한 몸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나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차마 훔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라오, 고마워요. 나를 절망밖에 없던 세상에서 구해줘서. 라오, 미안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라오, 잘 가요.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라오는 죽었다.
그때 트리실라 아제스가 검은 피를 토했다.
“나도, 너도 이제 갈 시간이 되었군.”
바유가 신관에게 말했다.
“카르테의 난민들을 여기까지 옮긴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트리실라는 꾸역꾸역 나오는 검은 피를 훔쳤지만 표정만큼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보였다.
“거기 꼬맹이, 이리 와봐.”
바유가 나를 지목하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가서 그의 시선을 뗄 수 없는 오드아이를 바라보았다. 바유는 손을 들어 내 머릿결을 만졌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때는 감히 라오를 껴안-”
굳은 표정으로 말을 하던 도중, 트리실라가 쓰러졌고, 그는 불현 듯 사라졌다.
◆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가 무심한 듯이 만진 내 머리카락과 그의 로맨틱만 마지막 말, 그리고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한 오드아이. 나는 어쩌면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할 마음이었지만, 두 번째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명을 써가며 여러 번 이드하 에투를 외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신계가 많이 바쁜가봐, 괜한 혼잣말을 하며 쓰린 마음을 달랜지 수십년.
타라카족의 처리가 마무리되고, 루체는 기뻐서 방방 뛰며 그에게 달려갔다. 바유는 무심한 듯 그의 소환사를 바라보다가, 눈동자가 매우 커졌다.
“너……. 라오의 머리색을…….”
◆
그가 윌라르브에 소환된 지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와는 대화를 한 번도 나누어보지 못했다. 바람의 신관 자리는 루체에게 넘어간 지 오래. 하지만 나는 그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대화를 해보고 싶어, 아니 한번이라도 그를 다시 보고 싶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오늘도 바람의 신전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바람의 신전 안에서는 바유를 존경하는 의미로 호티 바유가 금지된다.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이곳저곳으로 떠날 수 있는 바람 마법사들이지만 바람의 신전에서만큼은 자신의 방랑벽을 잠시 자제하고, 그들의 신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다. 물론 의족을 사용하는 나에겐 너무 힘들지만.
“다리 아파…….”
의족이 너무 아파 잠시 창틀에 걸터앉았다. 바람의 신전에서 바라보는 에어로플레토는 내 마음도 모르고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터를 지나가고, 마법물품과 신급아이템을 경매하는 경매장에선 가격을 올리는 외침이 가득하다. 소매치기가 길거리에 쌓인 사과 한 개를 훔쳐가고, 상인은 회초리를 꺼내 아이를 잡으러 달려간다. 마법대학생으로 보이는 무리는 두꺼운 책을 몇 권씩 쌓아 낑낑거리며 들고 간다. 나도 대학생일 때는 좋았지. 지금은 무직이지만. 브하바티 바유를 써서 저 멀리 방에 있는 물병을 가져와, 목을 축였다.
그때 인적이 드문 앞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무언가 힘들어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온다. 뭐지? 아픈 사람이 있는 건가?
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연녹색 머리의 신관과 물 빠진 듯한 잿빛 머리의 신이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나는 물병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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